도찬 증평 미륵사 주지
도찬 증평 미륵사 주지
  • 신도성
  • 승인 2013.08.16 15: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임진왜란 800의승 위령대재’ 추진위원장

20년 간 군 법사 봉직 … 사재로 부대에 사찰 건립 시주
“'임진왜란 800의승 추모관'건립에 여생 바치고 싶다”

스님은 수행하는 마음으로 10여년간 꽃을 가꿔 왔다. 야생화 전문가 수준이라고 자랑했다.
스님은 수행하는 마음으로 10여년간 꽃을 가꿔 왔다. 야생화 전문가 수준이라고 자랑했다.
“옛날 광음보살에 기도하여 기적처럼 백성들의 병을 고쳤다”는 전설에 나오는 '영험한' 관음보살이 지금 증평읍 송산리 미륵사에 봉안되어 있는 석조관음보살 입상이다. 이것은 고려 중엽에 세워진 것으로 수백년동안 지금의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그래서 마을 이름이 '미륵댕이'고 미륵사도 이로 인해 생겨난 사찰이다.

주민들은 1940년경 관음보살입상을 기도처로 삼고 그 옆에 초막을 지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불 타버려 1957년에 새로 전각을 지으면서 '미륵사'라 이름 지었다.

영험한 관음보살 … 석조관음보살 입상

도찬 스님은 법화종 전통사찰 '미륵사'의 주지다. 그는 중학교를 마치고 15살에 출가했다. 건강을 회복할 목적으로 산에 들어가 불교에 귀의했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고등학교 진학을 못하고 깊은 산속 절에서 요양을 했지요. 절에서 건강도 되찾고 진학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한평생 불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 후 불교종립학교인 대전 보문고등학교를 나와 서울 삼각산 도선사에서 불도를 닦았다. 그 사이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진학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중앙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에 진학, 사회복지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급 청소년지도사 자격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이다. 대학원 졸업 후에는 군 법사 장교로 임관, 20여년을 군에서 생활했다.

“군 법사는 설법, 의식집전, 각종교리 등 군 포교 일선에 필요한 내용들을 집중교육 받고, 군 임기동안 포교 임무를 수행하는 군인입니다.“

그는 “군 포교는 단순히 군인들의 불교신앙을 인도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미래를 책임질 청년과 대학생 불자를 양성하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초창기에 군에서의 포교활동 여건이 녹록치 않았다"고 회상하며 "불심으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열정과 정의감으로 군 법사 생활에 충실했다. 철원의 6사단 '청원사'는 스님 '도찬'이 아닌 군 법사 '정홍찬' 대위가 사재를 털어 사찰을 건립, 시주한 것이다. 그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수많은 일화를 남기고, 군 생활을 접는다. 수도방위사령부, 6사단, 37사단 등에서의 20년 군 법사 생활을 마치고 지난 2000년 소령으로 전역했다.

10여년 간 꽃 가꾸는 '야생화 전문가'

전역 후 지인의 도움으로 홀홀단신 증평 미륵사로 왔다.
“이 지역에서 군법사로 활동한 것이 인연이 된듯 합니다. 37사단과는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습니다.”
군 법사에서 민간 승려가 된 그는 객지에서 외로웠다. 스님도 인간인지라 느끼는 감정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꽃을 길렀다. 꽃들과 대화하고 마음을 나누었다. 혼자서 한밤중인 두세시까지 꽃을 보살피는 날이 이어졌다.

“당시는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묵언수행이 이루어졌습니다. 마음으로 대화라고 마음을 나누었으니까요. 허허”

꽃 키우는 것을 수행의 하나로 생각했다. 지금이야 지역 신도만해도 600여 명에 이르지만 처음에는 그에게 황무지나 마찬가지였다. 10여년 동안 이어진 꽃가꾸기는 그를 야생화 전문가로 만들었고, 미륵사는 다양한 1만 그루의 꽃들로 뒤덮인 꽃동산 사찰로 자리매김됐다. 그래서 인근 유치원과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자연생태학습장으로 인기가 높다.

대규모 행사 1년 동안 혼자 기획하고 추진

그는 석조관음보살입상 앞에서 지내는 마을 고사도 주관하고 있다. 마을의 평안과 주민의 건강, 풍년 농사 등을 기원하며 윤달이 든 해 음력 정월 대보름날 지내고 있다. 마을 주민과 더불어 생활한다는 의미에서 기꺼이 나선 것이다.

도찬 스님은 요즘 다음달 12일 증평에서 열리는 '임진왜란 800의승 위령대재' 준비에 눈코 뜰 새가 없다. 행사의 의미도 의미려니와 행사 참석 예상 인원이 3000명이 넘을 것이라고 한다. 대부분이 외지에서 참석하는 인원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대규모 행사를 1년 동안 혼자서 기획하고 추진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방문한 사찰만 해도 700여 곳에 이릅니다. 행사 초청장만 2000여장을 발송했어요. 위령대재 개최를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고 참석을 요청하기 위한 작업이었습니다.”

그는 종파를 초월한 전 불교도의 동참을 이끌어 내기 위해 동분서주한 것이다. 덕분에 이번 행사에는 조계종, 태고종, 법화종, 삼론종, 근본 해동종 등 각 종단의 스님들이 참석할 예정이다. 행사를 치를만한 장소가 마땅치 않고, 지방이라는 이유로 내부적으로 반대도 많았지만, 지역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증평 개최를 관철시켰다고 했다.

'가족 관광객이 찾는 템플스테이' 꿈 꿔

그는 '임진왜란 800의승 추모관' 건립을 위해 남은 인생을 바칠 작정이라고 했다.

“임진왜란에서 의승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지 400여년이 흘렀지만, 무덤도 없고, 추모 표지석 하나 없습니다. 의병이나 의승이나 다 같은 백성인데 이렇게 차별해서야 되겠습니까? 이제라도 국가에서 합당한 예우를 갖춰야 합니다.“

스님은 "아마도 당시 억불숭유 정책의 사회 분위기 탓일 것"이라며 "후손도 없는 이들의 혼을 달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선조실록에도 '영규대사가 승군 800명을 모아 의병장 조헌과 함께 금산에서 왜적을 공격했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전사했다'고 나와 있다”며 “ 당시 조정에서도 승병을 이끌었던 영규대사의 공로를 인정해 지중추부사(정2품)에 추증했다”고 역사적 기록을 거침없이 설명했다.

그는 회갑임에도 나이와 상관없이 참으로 열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 건강 상태가 온전하지 않음에도 혼신의 힘을 다하는 모습에서 일말의 경외감이 느껴진다.

스님의 개인적 소망은 '가족 단위의 관광객이 찾는 템플스테이'. 머지않아 스님의 바람이 이뤄지길 소망하면서 인터뷰를 마쳤다. /신도성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