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자 수필가
김길자 수필가
  • 이재근
  • 승인 2012.11.28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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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여성문학인 활동기반 다진 장본인

▲ 죽는 날까지 문학인 발굴 육성을 위해 헌신하고 싶다는 수필가 김길자 씨.
▲ 죽는 날까지 문학인 발굴 육성을 위해 헌신하고 싶다는 수필가 김길자 씨.


“한 일이 미미한 저에게 값진 큰 상을 안겨주셔서 증평군민들께 진심으로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이 교차합니다. 더욱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 좋은 작품으로, 세파에 메마른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따듯함을 안겨주도록 노력하고, 후배양성을 보람과 소명이라 여기며 열심히 창작활동을 하겠습니다.”
지난 10월 12일 보강천체육공원 일원에서 열린 증평인삼골축제의 개막식에서 문화·복지부분 증평군민대상을 수상한 수필가 김길자(71) 씨. “기사화 하기에는 제가 너무 부족하다”며 인터뷰를 여러 차례 사양하는 그를 겨우 설득해 커피숍에서 만났다. 꾸미지 않은 아주 평범한 주부에다 포근한 어머니 모습이었다. 이 작가는 지금까지 50명이 넘는 시인과 수필가를 양성해 문단에 배출시켰고, 현재도 후배양성을 위해 단체와 개인을 대상으로 무료 글쓰기 지도를 멈추지 않고 있다.

◆ 병마로 접은 꿈 중년에 실현
김 작가는 1941년 9월 증평읍 내성동 삼성당에서 조선후기 시인이자 문장가인 백곡 김득신 선생의 11대 후손으로 태어났다. 지금까지 고향을 떠나지 않고 지역의 문학 저변확대를 위해 노력하는 문인이다. 백곡 선생으로부터 문학적 재능을 물려받은 것일까? 그는 여학교 시절부터 문필가 꿈을 가졌다. 증평여중 시절에 쓴 소설 '오이와 열무김치'가 교지에 수록된 것이 계기가 됐다. 그는 이 무렵 등단을 꿈꾸고 신춘문예 공모에 시와 소설 등 문학작품을 수없이 응모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게다가 중3때 갑자기 찾아온 폐농양이 악화돼 문필가의 꿈을 접었다.
딸의 허약한 몸을 걱정해 한의사 집안으로 시집갈 것을 권유한 부모의 뜻을 따라 병이 거의 치료된 22살에 결혼을 했지만 첫아이를 낳은 후 병이 재발했다. 다행히 한의사인 시할아버지가 정성으로 지어준 한약 덕분에 병이 완쾌돼 6녀 1남의 자녀를 두었다. 딸 6자매 중 4명은 중·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 명은 고등학교 영어교사, 또 한명은 서울의 종합병원 수간호사로 일한다. 아들은 회사 중견 간부로 성장시켰다.
시조부의 사랑으로 건강을 되찾은 그는 막내아들을 유치원에 보내기 시작한 46살의 나이에 서원대학교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소녀시절 병마로 인해 접은 문필가의 꿈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 도내 지역문학동우회 발족 기여
지난 1986년 충북여성 백일장에 입상하며 문학 활동을 시작한 그는 같은 해 11월 충북최초의 여성문학단체인 '충북여백문학회'를 창립해 초대부터 3대까지의 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이 시기에 충북여성문학인들의 창작활동 기틀을 다져놓은 장본인이다. 1990년에는 증평문학회 창립 동인에 참여해 3~4대 회장을 맡아 '증평문학'지를 창간하기도 했다. 이후 제1회 증평시민백일장, 시화전, 문학 강좌, 한국유명 작고 문인 육필원고전 등 각종 문학행사를 개최했으며, 문학지에 전국에 살고 있는 증평출향 문인들의 원고를 수록하면서 고향, 출향문인과의 교류를 트기도 했다.
그는 괴산문학회 동인으로도 활동했다. 2002년엔 내수문학회를 창립시켰고, 2004년은 청원문인협회 창립고문으로 활동하는 등 도내 각 시·군의 문학회와 문인협회 등 문학동우회를 발족시키는데 앞장섰다. 그는 예술문화 불모지였던 증평지역에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증평지회(이하 증평예총)가 창립되도록 하는데 기여했다. 군으로 승격되던 해부터 증평예총창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해 활동하던 끝에 지난 2004년 10월 증평예총을 충북에서 6번째로 창립시켰다.
지난 2008년에는 한국전통민화협회 증평지회(증평목화회)를 창립해 초대부터 현재까지 회장을 맡아오며 4번의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 전시회는 군민들에게 한국전통그림을 알리는 계기다 됐다.

◆ 첫 수필집 '2001 국내수필' 100선 선정
지난 1991년 8월 수필 전문지인 월간 '수필문학' 2회 추천완료로 문단에 등단한 그는 20여 년간 300여 편의 문학작품을 완성시켰다. 이를 통해 개인저서 3권과 문학관련 논문 2편을 저술하고, 문학지에 수차례 수록하기도 했다. 지난 2001년에는 국민일보 '여의도 에세이'에 2년간 김길자 코너를 연재하기도 했다.
그동안 개인 창작활동에 열중한 그는 수필집 <열매 풍성한 나무·2000>, <파란향기·2004>, <빛의 방·2012> 등을 출간했다. 1집인 <열매 풍성한 나무>는 2001년 국내 수필 100선에 선정되면서 e-book으로 제작돼 현재 한국문학 도서관에 보관·전시중이다. 그는 '이상의 수필문학 연구', '산촌 여정' 등 2편의 논문집을 내 문학이론 정립에도 기여했다. 이와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충북우수예술인상, 제14회 한국수필문학 대상, 제13회 충북문학상, 증평군민대상(문화 복지 부문) 등 14차례에 걸쳐 크고 작은 상을 수상했다.
그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내가 태어나고 묻힐 이 지역 문화예술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기쁜 마음으로 노력할 것”이라며 “말없이 지켜보는 남편(박대규·76)에게 늘 감사함을 안고 산다”고 말했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죽은 혼이라도 영원한 예술인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의 한마디가 잔잔한 감동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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