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영근 전 괴산군의회 의원
봉영근 전 괴산군의회 의원
  • 이재근
  • 승인 2012.06.08 14: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학사업 통해 나눔정신 실천한 증평인”

'봉영장학회'를 만들어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40여 년 간 장학금을 전달해 학업에 열중하도록 하고 있는 봉영근 전 괴산군의회 의원
봉영근(63) 전 괴산군의회 의원은 가정형편이 어려워 배우지 못한 한을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성과 이름의 앞 글자를 따서 봉영장학사업을 해 온 것이 어느 새 35년의 인생길에 보람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현재는 서울연와 대표로 있으며 여러 가지 활동들을 통해서 삶의 윤활유 역할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 배움의 목마름 해소 위해 장학사업
그는 증평읍 창동에서 태어나 2남 4녀 중 넷째 아들인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인 정영희(61) 씨는 아래윗집에 사는 사이였는데 중매로 나중에 알고 보니 동창생이었다는 것. 그러니 지금껏 함께 한 시간이 얼마나 긴 세월인지 가늠할 수 있다. 하고자 하는 일에 항상 소홀히 하지 않고 뒷바라지를 해준 것에 고마움을 느끼는 봉 의원은 부부와 함께 살면서 서로 소통하고 이해하는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삼보초를 졸업하고 청주대 행정대학원을 수료하기까지 남다른 배움의 목마름을 해소하려 장학사업을 펼치게 된 것이다. 지역사회에서 많은 도움을 받으며 살아왔다고 느낌에 따라 환원사업으로 무엇을 할까 고민 중에 장학사업을 하게 됐다. 군 입대 전에 벽돌공장에 취업한 계기로 제대 후에 시멘트 벽돌공장을 운영하다가 연와사업으로 전환해 지금껏 40여 년간 장학사업과 함께 한 길을 걸어오고 있다.
3녀 1남을 두고 있는데 모교인 삼보초등학교는 우연찮게도 사위를 제외하고는 아들, 딸, 며느리까지 한 집안에서 7명이나 졸업한 것을 자랑거리로 여기고 있다. 앞으로는 손자까지 삼보초에 다니게 될 것이라며 모교 사랑이 남달랐다.

■ 어디든지 달려가 봉사활동 전개
그는 1995년 7월부터 시작된 제2대 괴산군의회 의원시절 제반사항들을 이뤄 나갔다. 하상잡목 제거 및 여름철 장마에 대비해 하천변 잡목제거와 하천 물줄기 바로잡기를 추진했다. 자랑스런 증평인으로서 충·효·예를 숭상하며 효자열녀의 고장으로 현대인들의 좋은 본보기의 삶을 살기 위해 지금도 노력 중이다.
1995년부터 1998년까지 4년 간 2대 괴산군의회 산업위원으로서 수해로 시름에 빠져있는 수재민 돕기 등 각 동네 하수구 정비 사업을 위해 동네마다 토관을 두 번씩이나 기증해 원상복귀 하는 일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군 의원 시절에 많은 일을 한 것 중 특히 보람으로 여기는 것은 1995년 서울 삼풍백화점 붕괴 당시 창동 주공아파트 부녀회원 8명과 함께 서울에 올라가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매몰자 발굴에 나선 구조대원들에게 자비로 밤새 따뜻한 국수를 삶아준 일이 보람으로 엊그제 일 같다고 했다.
어려운 상황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달려가 발 벗고 나서는 성품으로 의원 시절, 증평군이 괴산군 귀속 반대 궐기대회에서 당시 젊은 의원(48)으로서 지역 정서를 무시한 부당한 조치에 삭발 항의를 하기도 했다. 증평출장소 폐지 방침에 따라 항의하고 군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결집 시킨다는 취지에서 결심한 것이 보람 있는 일이었다고 피력했다.
또한, 길거리 인도 위에 난립해 있던 전선주가 지역민들의 통행에 불편이 있어 한국전력, 통신사와 협의해 정비하는 등 지역의 미관과 편의에 신경을 쓰기도 했다.
■ 1976년부터 35년간 장학회 운영
봉영장학회 활동을 하면서 1976년부터 2010년까지 35년간의 세월 동안 장학금을 받고 학업에 몰두했던 학생들이 지금은 결혼하여 자녀까지 낳아 잘 살고 있는 것을 보면 각별한 정이 샘솟는다고 한다.
특히 경제 사정으로 진학하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은 물론 수학여행비며 여러 가지 상부상조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일례로 충주대 증평캠퍼스(현 한국교통대) 입학식에 참석하게 됐는데 바느질품을 팔아 생활하던 어떤 여자 분이 아들의 입학식에 참석은 했으나 입학금마저 내지 못하는 딱한 사정을 보고 그 자리에서 선뜻 입학금을 전달해 주는 아량을 베풀었다. 그 학생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릴 정도였으니 남을 돕고자 할 때는 물불 가리지 않고 앞장서 왔다.
배우지 못해 앞을 못 보는 사람을 위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실어주는데 남다른 감회를 갖고 있다. 지금도 학자금을 내주어 학교를 잘 마치고 잘 살고 있다는 편지를 받을 때마다 공부는 때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가정형편상 배우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이 생기면 안 된다는 취지 하에 그가 장학회를 잘 만들었다는 자긍심을 가질만하다.
그는 증평여중, 증평중 육성회장, 형석고등학교 운영위원장, 당시 증평공업고등학교 육성회장 등 각 학교마다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 열정을 다 해왔다.
한편, 증평의용소방대부대장, 신용협동조합이사, 증평출장소 바르게살기운동부회장, 삼보초등학교 동문회 부회장, 증평산악회회장, 월남참전회부회장, 역전파출소 방법협의회 회장, 한국교통대 증평캠퍼스 육성회장 등 지역사회를 위해 여러 가지 활동을 해 왔다.
그 동안 지역 사회를 위해서 열심히 노력한 결과 의원의 길도 걷게 되었고, 현재 문화원 이사, 삼보라이온스클럽 회장, 봉영장학회 회장, 서울연와 대표로 생활하고 있다. 그는 대단위 아파트 건설의 여파로 전원주택 보급이 줄어드는 상황이라 연와사업이 하향세를 이루고 있어 평생 직업으로 여기며 살아왔던 중 불경기에 접어든 상황이라고 한다.
취미 활동으로 각종 신문을 사무실 가득 쌓아 놓고 우리나라가 나날이 발전하는 모습만 봐도 뿌듯하다는 그의 생활 태도에서 남에게 베풀 줄 아는 삶, 사회봉사에 충실한 생활을 해 오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밝은 미소가 번졌다. 취재/ 나영순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