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을 前 괴산군의회 의장
안병을 前 괴산군의회 의장
  • 나영순
  • 승인 2010.12.15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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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군 안병을 前 의장은 의회 초대 부의장으로 5년간, 2대 의장으로 3년 동안 군민을 위해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괴산군을 이끌어 온 장본인이다.
그는 괴산군 불정면 하문리 73번지에서 태어나 이담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다. 할아버지 밑에서 어려운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청주 사범 병설중학교를 졸업하고 청주고를 졸업할 정도로 학구열이 남달랐다.
청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거의 고학을 하다시피 서울 국민대학교 상과 3학년 중퇴로 군대 제대 후 바로 직업에 돌입하여 여기저기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사업도 하면서 10대 종손 종가집으로 할아버지마저 중풍으로 쓰러지셔서 어머니 홀로 고생이 너무 많아 80년대 초에 낙향하였다.

■ 불의를 못 참는 의회의 기틀
그 당시 강 건너는 감물면으로 불정면과는 연관이 없었지만 라이온스 클럽에 가입하여 활동을 하다가 지역 주민들의 권유로 학연, 지연이 없는데도 기초의원으로 출마하여 제일 어린 나이에 5:1의 경쟁률로 45세에 의원에 당선되는 행운을 얻었다.
기초의원 때는 공부도 많이 하고 일도 많이 한 시기로 영국 옥스퍼드 대학 등 일본 등에 두루 다니면서 교육에 전념하다시피 하여 전국 최초로 '의원 민원실'을 개설하여 14명의 의원들이 하루씩 돌아가면서 민원을 돌본 일은 군민의 힘이 되어준 큰 결실이었다.
또한 장연면 '학구조정'은 가장 큰 성과로 교육청과 타협하여 구역에 상관없이 가까운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배려한 점은 첫 작품으로 보람을 느끼는 부분이라는 점에서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태어나면 제주도로 보내라'는 환경의 중요성을 인식시켜 주었다.
학창시절의 적극성을 군정 활동에도 그대로 반영하였을 정도로 의원 시절을 돌이켜 보면 처음에는 명예직으로써 일당 3만 7천 원으로 애경사를 쫓아다니다 보니 우스갯소리로 지금까지도 그 빚을 안고 있을 정도로 힘든 상황이었음에도 보람 있는 일꾼으로 자리매김하기까지 하문교에서 조곡교까지 연결 다리를 놓은 점, 불정면 우회도로 건설, 물불을 가리지 않고 끝맺음의 처리가 최대의 장점인 그는 '의회당'이 지하에 있어 열악하였음에도 관선군수와의 차이가 그렇게도 컸던 점을 회상하면서 교육이 가장 큰 장점이고 의원들의 단결심이 최대의 강점이었던 점에 공무원들의 나태 안일함까지도 일깨워 줬고, 괴산군 발전의 지방자치단체의 디딤돌 역할을 하고도 남았을 만했다.
괴산군의 소소한 일들을 공무원보다 의원들과 협의하는 걸 군민들이 편리해하므로 괴산군에서 모범 의회 역할까지 했고, 우스갯소리라며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도 모르고 예산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여 지역 발전에 심혈을 기울이려고 동분서주 했었다고 회상하는 그와 담소를 나누는 동안 내내 혈기가 돋보였다.
비록 작은 의회지만 무시당하지 않고 잘 해 낼 수 있는 힘은 초대 의원들의 친목도모의 힘이 컸다는 그의 말에 대인 관계에 있어서도 불의를 못 참는 의회의 기틀을 마련한 당찬 의장으로서의 역할을 짐작하게 했다.

■ 여러 성과로 괴산군발전 주춧돌 역할

초대 부의장 시절, '문장대 용화온천 반대 특별 위원회'를 결성하여 위원장을 맡아 괴산군민이 모여 데모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일거라며 불씨를 붙여준 그의 역할로 말미암아 TV 등 매스컴을 전국적으로 많이 타 봤다는 말에 그 당시 괴산군이 모범 의회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그 때부터 '물에 대한' 연구를 끊임없이 해 온 결과, 달천강의 유래부터 충주 환경운동연합회, 시민단체, 각 사회단체, 충주대 등에서 지원을 받아 그것도 힘이 모자라 서울시 시의회 의원들 분과 위원까지 힘을 요청해 '문장대부터 충주댐'까지 유래를 설명해 줄 정도의 공부하는 의원으로서의 자세를 갖추었을 정도이니, 달천강의 물은 속리산 암반수를 거쳐 정화되어 내려온 물이 달천강 물의 양이 적어도 서울 수돗물을 정화하는 역할을 하니 큰 경상북도를 괴산군에서 성과를 보게 된 경위가 되어 표창을 받을 만했다.
그 후, 의장이 된 후에도 일을 멈추지 않는 추진력으로 괴산군의 땅이 75% 중 1/3이 국립공원에 묶여 있어 화양동 국립공원 앞에 속리산이 포함 되어 있는데도 군수입이 경상도에 편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군민들과 관리사무소에 새끼줄을 쳐놓고 사용 못하도록 시위를 하여 얻어낸 결과, 전국 최초로 국립공원의 군유지 사용료를 받게 되어 불이익을 받는 것을 타파하기 위해 '연풍조령삼관문'의 경상도와 충청도 입장료건 해결도 본 결과를 가져왔으니, 그의 추진력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달천댐을 막으면 괴산군이 거의 잠겨 없어질 형편이므로 고군분투하여 해결 하는 등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평화통일 12·13대 활동 당시 괴산군 홍범식 고택 위에 세계에서 가장 큰 원석으로 남북 지도를 설치한 점 또한 그의 자랑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충북에서 대단위 비닐하우스 단지를 괴산군 불정면에 집단화 시킨 점으로 최초의 유류 온실 하우스로써 오이, 방울토마토 등 시설 채소로 지금까지 신흥리에 있는 친환경 작목반 신종섭 씨는 부농의 결실로 연간 12억 원의 소득을 보게 된 일례로도 알 수 있다.

■ 아직도 끝나지 않는 고향 사랑
아쉬운 점은 불정면이 중원군에서 행정개편 되어 불정면으로 넘어 와 자료가 미흡한 관계로 목도강가에 '강수욕장'을 만들어서 재량 사업으로 연중 2천만 원씩 들여 편의 시설을 만들어 계속 배를 타고 건너다니는 '백중놀이'를 재현시킨 점을 앞으로도 계승 발전시켜 농악도 해주고 씨름도 지역 아닌 아마추어 전국 씨름대회로 하면 좋겠고, 올갱이 축제를 이벤트화 하여 세계대회로 기폭제가 되었으면 한다는 바람이 컸다.
아직도 식지 않는 열정이야 말로 불정면의 문화 사업에 기대를 해볼 만했다.
현재 그는 자연과 더불어 나무로만 손수 2년 걸려 지어진 고향집에 머물면서 의정 동우회 사단법인을 만들어 3대 회장과 충주의료원 이사를 맡고 있으며, 가족으로는 1남 1녀 모두 출가했는데 아들은 건설회사에 다니고, 장녀는 충북도청에 다니며, 어머니는 92세로 안병을 전 의장 내외가 모시고 있을 정도로 효심 또한 극진했다.
百年大計(백년대계)라 하지 않았던가, 앞을 내다보는 그의 추진력과 열정이 식지 않고 이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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