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수 통합진보당 중부4군 당협위원장
박기수 통합진보당 중부4군 당협위원장
  • 정선옥
  • 승인 2012.03.14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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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대표기자의 취중토크 아홉번째 손님


박기수 통합진보당 중부4군 당협위원장을 볼 때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물음표를 만나게 된다. 100년을 살아도 그것이 길었다 단언할 수 없고, 50년을 살아도 그것이 짧은 인생이었다 이야기 할 수는 없다. 무엇에 가치를 두고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박 위원장은 그 자신이 농민으로서, 농민을 위해 살았음을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아왔고 또 살아갈 것인지 명확히 아는 몇 안 되는 이들 중 한 명이다. 늦은 감이 있지만 제19대 국회의원선거일을 앞두고 박 위원장을 취중토크에 초대했다. 학생운동가로, 농민운동가로 치열하게 살아온 그가 꿈꾸는 세상이 궁금했다.


Q 이 자리에 초대받은 분이라면 누구나 받는 질문인데요, 주량은 얼마나 되십니까?
A 글쎄요, 측정불가 아닐까 싶은데요. 다른 술은 몰라도 막걸리는 좀 하는 편이거든요. 저는 농사꾼입니다. 들에서 일할 때 막걸리로 목을 축이곤 하죠. 뙤약볕 아래서도 톡 쏘는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면 고된 농사일도 거뜬합니다.

Q 오랜 세월 농민운동을 해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늦은 감이 있습니다만 정치를 해야겠다고 결심하시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A 농사일만 하던 사람이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지난 보궐선거 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떠밀리다시피 출마를 했었죠. 당시 강기갑 대표가 저를 만나러 집으로 오셔서 이런저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 뒤 부랴부랴 출마 기자회견을 하고 후보등록을 하고 선거를 치르고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저의 꿈은 소박해요. 검게 그을린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패고 오랜 노동으로 허리가 굽은 농민들이 활짝 웃는 세상을 만들고 싶을 따름입니다.

Q 사모님은 반대하지 않으셨나요?
A 사실 처음엔 두려웠습니다. 모든 것이 너무 갑작스러웠고 중책을 맡게 되었다는 부담이 컸거든요. 그 때 제게 힘과 용기를 준 사람이 바로 집사람이었습니다. 아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저희 집사람이 저보다 더 유명해요. 현명하고 강단 있죠. 저보다는 집사람이 더 적극적이었어요. 예나 지금이나 배우자라는 느낌 보다는 함께 하는 동지라는 느낌이 커요. 항상 고맙죠.

Q 오늘 취중토크 하시는 건 알고 계신가요?
A 예, 이야기 했습니다. 잘 하고 오라고 하던데요. 물론 술 많이 마시지 말라는 이야기도 덧붙이구요.

Q 이 자리에 오시면 기본적으로 술 두병 정도는 드시고 시작해야 하는데요. 말 그대로 형식과 격식이 없는 진솔한 대화를 지향하는 취중토크 아닙니까. 저는 선출직이라면 실수하는 모습조차도 국민에게 보여주고 검증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나저나 고향이 전북 군위라고 들었는데 진천에는 언제 오신 겁니까?
A 진천에 내려온 게 1990년이니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네요. 길다면야 긴 시간인데 지난 선거를 치러보니 타향인 것이 실감나더군요. 어찌되었든 제가 뼈를 묻으리라 생각하고 온 곳이고, 또 여기서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아 키웠으니 이제 진천이 제 고향인 셈이죠.

Q 옳으신 말씀입니다. 태어나 고향이기도 하지만 살아서 고향이기도 하니까요. 그나저나 진천으로 오신 계기가 궁금하네요.
A 대학교 4학년이 됐을 때 저는 농부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농사를 짓고 농민을 위해 살기로 결심하고 여러 면에서 가장 낙후됐다고 생각한 충북을 택하게 된 겁니다.

Q 대학교 4학년이었고 더구나 고향도 아닌 충북에 정착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으셨을 텐데요.
A 4학년이라고는 해도 나이가 적지는 않았습니다. 학교를 워낙 늦게 들어갔거든요. 그 때 충북대에서 전농충북도연맹총회가 있었는데 무작정 거길 찾아가서 지역사람을 찾아 인사를 했습니다. 그 때가 30대 초반이었죠.

Q 그럼 그때부터 줄곧 농민운동을 해 오신건가요?
A 지금도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20년을 넘도록 농민운동을 해 왔는데 날이 갈수록 농민들이 더 힘들어지는 현실을 보고 있노라면 그동안 나는 뭘 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 농민들의 요구는 우리나라의 근간인 농업을 인정하고 국가에서 농민을 보호해 달라는 이야깁니다. 오랜 시간 농민운동을 해 왔지만 농촌이 황폐화되는 것을 막지 못했고 또한 농민들을 위한 제도를 만들어내지 못한 책임을 전농 간부로서 통감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 근로자들 보다 못한 최하층민이 농민들입니다. 작금 농촌의 현실은 자경 농민이 전체 농업인구의 20%도 안 되는 실정입니다.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했다는 뜻이지요. 이제는 국가가 나서서 농민을 보호해야 합니다.

Q 농민들의 부채가 지속해서 느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A 우리나라 농산업은 구조적으로 문제가 많습니다. 우선 요즘 같은 세상에 농사를 짓기 위해선 많은 시설 투자가 필요합니다. 종자 하나까지도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고 토종이 아닌 개량종이다 보니 노지에선 재배가 불가능해 하우스 같은 시설과 난방 시설이 추가로 들어가게 됩니다. 헌데 특정 농산물의 재배면적이나 생산량의 증감이 심하다 보니 수확 때가 되어 가격이 추락해 버리면 시설 투자비용이 그대로 부채가 되는 겁니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게다가 농산물까지 수입이 몽땅 개방될 판이니 앞으로의 일이 더 큰 걱정입니다.

Q 수입 개방 얘기가 나왔으니 여쭤봅니다만 예전에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체결 때도 당장 포도재배 농가가 망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A 당시 정부는 몇 개 종목에 대해 폐농을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자유무역이 시작됐죠. 하지만 그 피해는 고스란히 농민의 몫이 되고 있습니다. 일례로 포도를 수입한다면 단순히 포도만이 아니라 포도 가공품이 무관세로 들어오게 됩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포도 철이 따로 있지만 그네들은 연중 생산이 가능해 다국적 기업인들을 등에 업고 이미 대부분의 유통망을 장악한 상태입니다. 지난 수년 간 사시사철 포도를 먹지 않을 수 없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은 것이지요. 혹자들은 우리 농산물의 질을 높이면 되지 않느냐고 이야기 합니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또 고비용이 투자되어야 하는 악순환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한-미FTA는 한-칠레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그 타격이 큽니다.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골목상권도 ISD(투자자 국가소송제도) 조항에 다 걸리게 되어 있어서 보호가 불가능해집니다. 한-미 FTA는 반드시 폐기되어야만 합니다.

Q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럼 잠시 무거운 이야기는 뒤로 하고 위원장님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해보고 싶은데요. 사실 위원장님이 어떤 사람인지, 정치인 이전에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지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으시거든요. 형제는 어떻게 되시나요?
A 6남매 중 다섯째로 자랐습니다.

Q 어린 시절은 어떠셨나요?
A 어릴 때에야 작은 동네에서 수재 소리는 듣고 컸지요. 아버님은 농사짓고 사람 좋아하는 분이셨고 어머님은 헌신적인 분이셨어요. 그런데 아버님이 중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어요. 당시 저희 집이 과수원을 해서 그래도 먹고 살만큼은 됐었는데 아버님이 몇 년을 병중에 계시는 바람에 집안이 어려워져서 아버님 돌아가시고 나서는 보리쌀도 없을 만큼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Q 아직 형제들도 어렸을 땐데 그럼 어머니께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셔야 했겠네요.

A 어머님은 교육열이 높은 분이셨어요. 제가 중학교 3학년이 되니 고등학교를 보내야 한다며 식모살이에 나서셨어요. 요즘 같으면 가사도우미라고 하죠. 어린 나이였지만 정말 가슴이 아팠습니다. 아버님이 살아 계실 때는 장날에도 밖엘 잘 나가지 않던 분이셨거든요. 그래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겠다고 말씀 드렸지만 막무가내셨어요. 결국 어머니는 부산까지 가서 일을 하셔야 했습니다.

Q 고등학교를 중퇴하셨다고 들었는데요.
A 고등학교에 입학해 대구에 방 하나를 얻어 자취를 했어요. 어머니도 그 때는 대구로 올라오셔서 식당 일에 남의 집 일에 고생이 많으셨어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선생님게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래도 학교는 다녀야 한다면서 학교 생협에서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어요.

Q 생협이라면 교내 매점 말씀이십니까?
A 예. 아침에 일찍 나가서 판매를 하고 점심시간에는 교실로 다니면서 진학지나 영어잡지 같은 것을 팔았어요. 그 때 한 달에 3천원을 받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께 불효하는 것 같아 영 마음을 잡을 수가 없어서 이젠 정말 그만 두어야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다가 어느 날 운동장에서 전교생이 모인 가운데 선생님께서 제 사정을 이야기를 하고 박기수 돕기 모금운동을 벌이셨어요. 철이 없었는지 그 때는 그 일이 왜 그리 창피하던지 모금액이 꽤 됐었는데 일체 거절하고 다음날부터 학교를 안 갔어요. 자퇴서를 냈는데 학교에서 안받아줬어요. 그게 2학년 2학기 때의 일입니다. 그렇게 1년을 놀았는데 그러다 보니 동창들이 졸업을 하고 대학엘 간다고 해요. 그걸 보니 저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Q 그러면 사회생활을 하시면서 공부를 하신건가요?
A 그 나이에 사회생활이랄 게 있겠습니까? 2학년 말 쯤에 학교를 그만두고 6개월 정도는 방황을 많이 했어요. 그리고 근처에 있는 석재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그 때 느낀 것이 정신을 차리려면 노동을 해야 한다는 거였죠. 아무튼 그래서 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고 곧바로 대입시험을 치렀어요. 친구들보다 1년이나 늦은 셈이죠. 죽어라 공부했는데 뜻을 이루진 못했어요. 당시 경북대에 들어갈 성적은 됐는데 저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거든요. 암튼 공부는 그 때 가장 많이 해 봤어요. 그리고 군대를 가게 됐죠.

Q 경북대에 갈 실력이면 나쁘지 않았는데요.
A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았어요. 정말 군대 가기 싫었죠. 그런데 달리 연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어요.

Q 제대 직후에 다시 공부를 시작하셨나요?
A 제대하고 나서 고향집엘 왔는데 형님이 결혼을 하셔서 아이들이 어릴 때였어요. 제가 얹혀 살 수는 없었죠. 집에 일주일쯤 있다가 대구로 나왔어요. 북부 터미널 인근에 여인숙을 잡고 현장에서 막일을 시작했어요. 밑바닥 생활을 한 거죠. 그렇게 현장에서 1년을 일했는데 어떻게 들릴지는 몰라도 신분상승의 욕구 같은 게 생겼습니다. 우리 사회는 대학을 안 나오면 사람 취급을 못 받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는데 학원비는 너무 비쌌고 힘든 일을 하면서 공부하려니 쉽게 지치더군요. 그래서 대구를 떠나 대전을 거쳐 서울 노량진으로 갔습니다.

Q 노량진이라. 입시학원들이 밀집한 곳이죠. 거기 생활도 만만하지는 않으셨을 것 같은데요.
A 그 때가 1985년이었어요. 27살 땐데 사실 저도 힘들게 생활했지만 저보다 더 힘든 친구들도 많았어요. 그래도 젊은 친구들이 많이 도와준 덕에 그곳에서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는 오로지 신분상승이라는 목표만이 있었죠.

Q 그렇게 어렵게 대학에 진학하셨는데 학생운동을 하셨고, 또 4학년 재학 중에 학교를 그만두고 농촌행을 택하셨네요.
A 제가 그토록 힘들게 대학에 간 이유는 오로지 신분상승이라는 목표를 위해서였습니다. 대학을 나오지 못하면 사람 취급을 못 받는다고만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막상 대학에 입학하고부터는 온통 충격의 연속이었습니다. 공사현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대학을 다녔고 경제학, 인문학 서적들을 탐독하며 세상의 불합리한 구조에 눈을 뜨게 됐습니다. 제가 이 길을 선택한 건 살면서 주위에서 받은 도움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를 위해 남의 집 일까지 하셨던 어머니, 그리고 저의 공부를 도와줬던 어린 친구들, 함께 일하던 노동자들. 그 외에도 많은 분들이 제게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제가 그분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학력은 큰 의미가 없었어요.

Q 그럼 사모님은 진천에 오셔서 만나신건가요?
A 아닙니다. 그 당시에도 농촌 총각들이 장가를 못 가던 시절이었어요. 이제 시골로 내려가면 영영 장가 못 가겠구나 싶었는지 그 때 주변에서 집사람을 소개시켜 준 겁니다.

Q 함께 학생운동을 하셨는데 이전에는 안면이 없으셨나요?
A 얼굴이야 알았죠. 집사람이 서울여대 총학생회장이었으니 모를 리가 있나요. 지금이야 말이지만 처음에 딱 봤는데 아주 못생겼는데 강단 있게 생겼더라구요. 집회라도 할라치면 키도 작은 여자가 엄청났어요. 인연이라는 것이 따로 있긴 한가봅니다. 집사람은 배우자로 나이가 좀 있는 사람을 원했어요. 8살 차이니 조건이 맞는다 생각을 했나 봐요. 또 나는 농사를 지으러 농촌에 갈 사람이라고 했는데 집사람이 기꺼이 자기도 그러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진천에 내려와 전통혼례를 올렸죠.

Q 두 분 모두 진보성향이 강한 분들로 알고 있는데요, 그래도 아이를 낳고 살다보면 보수화 되는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A 저희 부부는 집회 현장에도 아이들을 데리고 다녔어요. 엄마 아빠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또 어떻게 싸우는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처음 제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을 때 불편부당한 것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운동은 병행해 나가는 것입니다. 변화하지 않는 운동은 없습니다. 사회운동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는 과정입니다.

Q 그러면 자녀들이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A 본인들이 하겠다고 한다면 말릴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큰 아이는 집회 현장에서 엄마 아빠가 고통 받는 모습을 많이 보아서인지 소통에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이들에게 어디서 무엇을 하더라도 올바른 세상을 위해 살아가라 이야기 합니다.

Q 존경하는 분이 있으시다면.
A 국가와 민족을 위해 평생을 투사로 사신 백범 김구 선생님을 가장 존경합니다. 그리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자리를 지켜 주시는 우리 농민들. 또 저의 영원한 동지이자 든든한 후원자인 아내 이해자씨를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Q 부부가 같은 이상과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함께 나아간다는 것이 너무 좋아 보입니다. 이제 국회의원 선거가 목전에 왔는데, 위원장님 본인만의 장점을 말씀해 주신다면.
A 제가 가진 장점이라면 한 지역에서 20년 넘게 꾸준히 살아왔고 또 농사일에만 전념해 왔다는 것이 장점이라 할 수 있겠죠. 그만큼 지역의 사정을 잘 알고 지역민의 마음을 대변할 수 있는 지역 맞춤형 후보인 셈입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여담이지만 요즘 어디 인사를 가면 주민들이 선거 때만 보인다고들 하세요. 당연하죠. 저는 농사짓느라 바빠서 선거 때 밖에 못 다닌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어르신들이 맞는 이야기라며 맞장구를 쳐 주십니다. 하지만 선거 때가 아니어도, 또 행사장엘 다니며 유세하지 않아도 저는 늘 이 자리에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구요.

Q 마지막으로 국회의원이 되려 하시는 궁극적인 목표라고 해야 할까요.
A 제가 꿈꾸는 사회는 다양성이 존중되고 차별이 없는 1%의 소수 기득권층이 아니 99% 다수 농민, 노동자, 서민들이 행복한 세상. 그것이 저 박기수가 만들고 싶은 세상입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시계바늘이 자정을 향해 있었다. 한 지역에 오래 살았어도 어떻게 그동안 서로 이런 자리 한 번 마주할 기회를 만들지 못했나 하는 아쉬움이 있다. 번지르르한 화려함이 아닌 속 깊은 소박함, 굳은 신념, 확고한 목표의식, 농부의 소탈함, 꾸밈없어 오히려 직선적인 말투…. 딱히 뭐라 콕 찍어 이야기 할 순 없지만 그에게는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다. 인위적으로 사람을 끄는 거북함이 아니라 저절로 끌리는 기분 좋은 만남이다.
뒤늦게 남편을 응원하기 위해 달려온 부인 이해자씨. 한 마디 한 마디 나누는 말소리에 부부는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이 그득하다. 옛말에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다. 사람이 사람의 가치를 잊고 사는 요즘 세상에 저같은 부부도 흔치 않거니와 이처럼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할 줄 아는 이라면 다른 이들에게도 같은 마음일 수 있겠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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