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민 前 증평문화원장
송기민 前 증평문화원장
  • 나영순
  • 승인 2011.01.21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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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역사의 고보…노변향사(爐邊鄕史)

아직 그대로 부지할 행정관청의 기록문서 이외의 주민들의 저변 속에서 일어나는 喜悲(희비), 哀歡(애환), 노래, 놀이, 事件(사건), 事緣(사연) 들은 口傳(구전)으로 전해온다. 그러다가 한 두 세대 지나면 잊혀지거나 소홀해져 지나쳐 버리게 된다. 그럼으로써 우리 조상들이 남긴 흔적들이 방치되거나 훼손, 소멸 되고 있어 몹시 안타까움이 빈번한 사실이다.

이에 우리 주변에는 조금만 살펴보면 우리들의 관리, 보존이 필요한 여러 어른들의 유산이 너무 많다. 세월이 흐르다 보면 물증도 없어진다. 그리고 기억도 연로한 어른들도 우리 곁을 떠나게 되면 영원히 역사의 뒤안길로 묻혀 버리게 된다. 이에 칠십이 넘은 老軀(노구)에도 불구하고 증평 인들이 살아온 애환과 정담들의 이야기들을 남다른 애향심과 향토사를 보존하려는 집념 하나로 몸소 체험한 근세의 생생한 증평의 이모저모를 모아 '노변향사'(爐邊鄕史)를 펴낸 집필자이자 여행가로서의 삶이 그 누구보다도 진지한 이가 송기민 전 문화원장이다.

송기민(74) 전 증평문화원장은 '여행유감'과 '노변의 향사'를 집필하면서 증평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70평생을 증평에서 살아오며 그 동안 보고 듣고 체험했던 생생한 이야기를 글로 풀어낸 것이다.

노변은 화롯가이고, 향사는 고향의 야사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정겨운 화로의 따스함과 고향이라는 정감이 곁들여진 동네 이야기다.

묻혀져 없어질 향토사들을 모은 우리 고장의 유산인 내용으로는 '해방되던 날 당시 증평민도 수준급', '현 단군전 관리실 밑으로 활터인 상덕정', '빼앗긴 상권 되찾을 목적으로 설립된 증평상사조합', '증평번영회', '증평초등학교대운동회', '조선금광제련소', '최초신식술집낙원카페', '증평양조장', '최초신여성 도죠 센세이', '최초양의사 정승화 씨', '최평국 씨 전(傳)', '잠업강습소', '물탕곶', '기차통학생', '증평최초의 여대생', '증평읍장', '증평의 부자들이야기', '술의 종류와 역사' 등 다양한 소재거리로 증평을 이야기했다.

그 지역의 야사(野史)의 중요성은 정사(正史)에는 기록 할 수 없는 부분을 남기는데 그 목적이 있다. 어두운 면도 기록하지만 후손들의 인격과 화합이라는 차원에서 예를 들면 모모 국회의원이 주민들의 숙원 사업인 어느 어느 공사를 완공하는데 기여했다던가, 어느 어느 군수 또는 읍장이 어떤 기관을 유치했다는 등은 정사에는 기록 할 수 없어 생략했다고 밝힌 점을 '노변향사' 책을 통해 알 수 있는 점이다.


■ 연년세세 화상사(年年歲歲 花相似) 세세년년 인부동(歲歲年年 人不同)

'해마다 해마다 꽃은 똑같게 피어나는데 해마다 해마다 사람은 그 모습이 변한다'는 말처럼 오늘의 우리 주변은 나날이 변화무쌍하다.
길지 않은 증평의 역사를 가진 문화와 예술을 어려운 여건 속에서 초대부터 2대까지 문화원장을 맡아오면서 잊혀지고 사라질 뻔한 문화재를 발굴 보존함은 물론 전세계 각국을 여행하면서 세계의 전통과 문화 역사를 체험하며 여행기를 집필해 생생하게 전해 준다.
몇 해 전에는 집에 혼자 두고 보는 것보다 여러 젊은 세대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자원봉사자로 증평 정보고에서 4년간 유럽 47개국을 아무것도 안 보고 생생하게 파노라마처럼 그려내는 현실감으로 학생들을 지도했던 점이 아직도 즐거움으로 남는다는 그의 말에 후학양성에 중요성을 알 수 있었다.
특히 남자분이 어떻게 인형을 모으기 시작했느냐는 기자의 말에 “인형은 아기부터 80세 노인에 이르기까지 좋아하는 것”이므로 늘 밀접하게 접하는 일과라고 했다. 그 나라의 민족성을 담고 있는 인형이야말로 소중한 것인데 그래도 가장 좋아하는 인형은 뭐니 뭐니 해도 우리 나라의 인형인 '이도령과 성춘향' 스타일이 가장 좋다는 점에서 그의 애국심과 여행과 연결된 취미 생활도 엿볼 수 있었다.


■ 있을 자리 찾아서 준 것 뿐


증조부인 송구호 전 제주목사(牧使·1850∼1915)가 재임시절 소장했던 교지(敎旨)와 유서(諭書), 대과 급제 홍패(紅牌), 탐라제군사명기(耽羅諸軍司命旗), 복대(腹帶), 허리띠장식 등 7점의 유물을 제주시에 기증하는 등 기증문화 확산에 앞장서 왔다.
조부는 고종황제한테 발령장을 받고 17일 씩이나 걸려 당도한 제주도에 2년간 목사 일을 맡아 보던 곳이기에 명예도민증을 갖고 있다고 했다. 요즘은 시대가 발전하여 7시에 아침 식사를 하고 9시면 제주도에 당도하여 회의에 참석 할 정도이니 세월이 얼마나 급속도로 빠른가, 이에 발맞추어 아직도 여행은 끝나지 않았다는 그의 말에 능력이 닿을 때까지 인형 수집을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
이제는 인형을 깨뜨리지 않고 수집해 올 정도로 베테랑이 다 되었다며 서재에서 조그만 보따리 하나를 안고 나왔다. 음료수 페트병을 세로로 잘라 그 안에 인형을 넣고 다시 테이프로 붙여 깨지지 않도록 방법을 강구하다 보니 누구보다도 안전하게 집까지 가져올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얼마 전에 수집해 온 인형 3개를 충주대에 또 기증할 것이라며 즐거움을 표명했다. 그에게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인형 수집의 길은 계속 되고 있었다.


■ 새도 발자국을 남기듯이… 자국을 남기고 싶어

좌우명으로는 처하고 있는 위치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에 속해야 한다는 지론이다. 심신(心身)을 닦고 집안을 정제(整齊)한 다음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天下)를 평정(平定)해야 한다는 修身齊家治國平天下(수신제가치국평천하)처럼 내 몸과 내 집은 잘 다스려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다.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인형들은 각 나라의 전형적인 얼굴모형에 전통의상을 입혀 동화 속 주인공을 연상케 했다.
“세계민속인형이 고향에 다시 돌아오게 돼 기쁘다”며 충주대에 다시 한 번 깊은 감사의 뜻을 전했다.
한편 2008. 10.2~10.8 충주탄금대유엔평화공원에서 개최된 '세계민속인형전' 때 국립충주대학교 문화산업연구소와 문예창작학과의 기획, 산업디자인학과의 디자인, 그리고 충주시의 주관으로 각 나라별 인형들을 엽서로 제작하기도 했다.
2008년 2월,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모은 100여 국가의 민속인형 700여 점을 증평에 캠퍼스를 둔 국립충주대에 기증했다.
여행 할 때마다 토산품점이나 면세점에 들르는 것이 일상이 되어 사비를 들여 직접 구입한 것으로 1,000원에서 몇 백만 원까지 이른다.
청주에 있는 충청북도 도교육위원회에 방문객들이 두루 살펴 볼 수 있는 미술품과 운석, 화석, 화폐 등 교육 자료 등 다양한 민속자료 278점을 기증하기도 했다.
인간의 모습을 닮은 인형은 사람에게 가장 익숙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민속인형은 각 민족의 전통의상이나 민속신앙을 매우 잘 반영하고 있다.
때로는 숨은 외교 사절의 노릇을 톡톡히 하기도 하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사람들은 인형을 만들면서 단순히 인형 자체에 몰두하기도 하지만 주변인들의 삶을 반영하거나 구복(求福) 혹은 특정 의미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과학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인형을 대상으로 한 상징의 고리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하지만 각국의 민속인형들은 아직도 부분적 의미의 삶을 단편적으로 간직한 채 우리 곁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는 여행가로서의 기쁨을 평소에 속해 있던 문화권에서 이질 문화를 접하는 계기, 소풍 가기 전날의 설렘, 미지에 대한 동경을 아직도 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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