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호 前 내무부장관
김종호 前 내무부장관
  • 이상훈 대표
  • 승인 2013.11.17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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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은 생 고향 발전 위해 바칠 것 ”



출생지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

약력
서울대 행정대학원 졸업
충청북도지사
제11대~제16대 국회의원
내무부장관
정무 제1장관
국회 예산결산특별위 위원장(제11대, 12대)
국회 부의장
세계 스카우트 의원연맹 명예총재
대한민국헌정회 부회장(現)


굳이 김종호 前 내무부장관의 업적이나 약력을 일일이 읊지 않아도 충북도민이라면 그가 괴산 출신임을, 나아가 충북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다. 한평생을 고향의 발전과 충북인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살아온 그다.
내무부 차관 시절,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민정당 전국구의원 후보로 지명돼 정계에 입문한 김종호 장관은 국회에 등원하자마자 상임위원장에 이어 가장 핵심적인 요직이랄 수 있는 예결위원장을 4회나 역임했고, 제12대 총선에서는 진천·음성·괴산 지역구에서 출마해 전국 최고 득표율이라는 기록으로 재선에 성공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11대부터 16대까지, 6선의원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살았던 24년 동안 국회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국민들에게 비쳐진 김종호 장관의 모습은 한 마디로 '작은 거인' 그 자체다.
비록 국회를 떠났지만 아직은 여의도에서 할 일이 많다는 김 장관은 요즘 대한민국 헌정회 부회장을 맡아 후배 의원들을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충북도민의 요구를 중앙에 전달하는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 '아직은 내가 여의도에 있어야 할 이유'라고 밝히는 김종호 前 내무부장관을 여의도 보이스카우트빌딩에 위치한 그의 집무실에서 만나 그간의 활동사항과 근황,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들어보았다.


Q 근황은 어떠십니까?
A 여전히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국회를 떠났다고는 해도 찾아오시는 분들도 많고, 또 아직은 여의도에서 고향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6선 의원으로 의정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우리 충북도민의 아낌없는 사랑과 격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은 인생,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고향을 모두가 잘 사는 곳으로 만드는 것이 저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Q 사실 장관님이 계셨기에 충북이 이만큼 발전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현역 시절, 충북에 예산을 많이 배정해 주신 덕분에 중부권이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게 되지 않았습니까?
A 아무렴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내 지역구를 더 챙기게 되지요. 1980년 충북도지사로 임명돼 초도순시를 나가 괴산군청을 가는데 군청 가는 길이 포장도 안 된 자갈길이더군요. 그 때 느낀 점이 참 많았습니다. 아무리 충북이 도세가 약하고 외진 곳이라고는 하나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모래재는 눈이 조금만 와도 넘어갈 수가 없었어요. 청주까지 길이라도 뚫려 있어야 먹고 살 것 아닙니까? 그만큼 우리 충북, 특히 괴산지역이 낙후돼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나중에 7,500억원이라는 예산을 투입해 도로를 확·포장 하게 되었습니다.

Q 원래 예결위원장은 한 번 하기도 힘든데 네 번이나 하셨습니다. 덕분에 우리 충북도민들이야 혜택을 많이 받았지만 특별한 비결이라도 있으셨나요?
A 예결위원장이라는 자리가 결코 쉬운 자리는 아닙니다. 원래 예산결산은 12월 3일까지가 법정 기한입니다. 그 날짜까지는 모든 것이 다 끝나 있어야 해요. 요즘은 제 날짜에 예결이 끝나는 법이 없지만 저는 달랐어요. 한 번도 기한을 넘겨본 적이 없습니다. 남들이야 날치기네 어떠네 해도 저에게 주어진 임무는 완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국회위원 중 제가 멱살도 가장 많이 잡혔을 겁니다.

Q 고향을 떠나신 지도 한참 되셨는데 고향에서 보낸 어린 시절 이야기 좀 해 주시지요.
A 제 고향은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입니다. 경치가 좋기는 하지만 지리적으로 봤을 땐 너무도 외진 곳이었어요. 고개를 들면 주변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서 하늘만 보이는 곳이었답니다. 아버님이 문광소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셨어요. 어쩌다 어머니가 친정인 청주를 가시면 아버님이 듬직한 학생을 골라 집에 가서 절 좀 봐달라고 부탁을 하셨던 모양입니다. 당시에는 학생들 나이가 일정치가 않았으니까요. 저 역시 서너 살 때라 기억을 못했는데 도지사 시절, 민방위 표창이 있어서 괴산에서 한 분이 올라오셨는데 시상식 직후 리셉션장에서 제 옆에 앉아 하시는 말씀이 “도지사님, 어렸을 때 제가 많이 업어드렸어요”라고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래서 “저를 업어주셨어요?” 했더니 “그럼요, 어머님이 청주에 가시면 제가 업어드렸어요. 칭얼대다가도 업고 산으로 달려가면 어느새 울음을 뚝 그치곤 했어요”라며 반가워 해 주시는데 눈물이 다 났어요.

Q 감회가 새로우셨겠네요. 그럼 줄곧 괴산에서만 학교를 다니셨나요?
아닙니다. 중학교에 다닐 나이가 됐는데 아버님이 아무래도 큰물에서 공부해야 한다고 해서 외가가 있는 청주에서 중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시골 촌놈이 대도시 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그래도 2학년 때는 전교 1등을 했어요. 그래서 학교에 다른 선배들과 함께 사진이 걸렸었는데 학교가 분리되고 이전하는 과정에서 분실됐나 봅니다. 이후 청주고에 입학했는데 그 때는 총학생 위원장 한다고 바빠서 1등으로 졸업을 못했어요.

Q 재목을 알아보셨기 때문에 대도시로 보내시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워낙 머리가 비상하기로 소문난 분이시잖습니까? 장관님 기억력은 지역구에서도 계속 회자될 정도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예전에 선거운동 하실 때 길에서 한 분이 인사를 하셨는데 몇년만에 만나 그 분 아들 이름까지 외우고 계셔서 놀랐다는 후문이 있었습니다.
A 저도 기억이 납니다만 그건 기억력 보다는 사람에 대한 관심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 그분들을 기억하듯이 그분들도 저를 기억해 줄 테니까요. 지금도 그렇지만 저는 현역의원 시절에도 저에게 오는 우편물을 일일이 확인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한번은 어떤 여자분이 편지를 보내 초등학교 2학년 때 지사님이 오셔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신 기억이 난다면서 자기 남편이 동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는데 시청으로 가는 것이 소원이라며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고 부탁할 곳도 없어 그냥 제 생각이 나 편지를 보낸다고 하더군요. 어찌 생각하면 청탁일 수도 있지만 당시 제 마음은 내 고향 사람이 타향에 와서 저렇게 마음고생을 하는가 싶어 도와줄 수 있는데 까지 도와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다행히 일이 잘 풀려서 전화를 드렸더니 그분이 얼마나 울던지 전화를 끊고 저도 마음이 아파 혼났어요. 오죽 답답했으면 저한테까지 편지를 보냈을까. 우리 고향 사람들이 타지에 와서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와줄 수 있는 동향인, 즉 인맥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Q 좀 전에 말씀하셨지만 충북이 도세가 약한 것은 사실입니다. 불이익을 당한다는 표현은 좀 어울리지 않지만 인맥이 제대로 형성돼 있지 못하기 때문에 충북 출신들이 더 크지 못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A 제가 7선에 도전한다고 했을 때 사실 가족들도 반대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를 무릅쓰고 도전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직까지 충북 출신 국회의장이 없어요. 저는 국회의장을 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습니다. 의장이면 대통령과 독대도 가능한 자립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거든요.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좀 더 높은 지위에서 후배들을 이끌어줄 사람이 필요할뿐더러 내 고향사람 모두가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고 싶었습니다. 평생을 그 일을 위해 살았지만 아직까지도 이루지 못한 일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촌놈 출신도 큰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더 이상 충북출신들이 '핫바지' 소리를 듣는 일 만큼은 없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왜 이런 억울한 소리를 들어야 합니까? 우리 중부4군이 정말 잘 살도록 만들어 놓고 은퇴해야 하는데 그 생각을 하면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Q 장관께서 많은 일을 하셨다는 건 충북도민이라면 누구나가 다 알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실텐데요.
A 기억에 남는 일이야 많지요. 그래도 꼽아 보라면 도지사 시절 청주대학교를 종합대로 승격시킨 일입니다. 청주대는 한강 이남 대학 중 우리나라 정부가 최초로 인가한 대학으로 유서 깊은 학교입니다. 청주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충북도민들의 숙원사업이었는데 이게 어렵더라구요. 헌데 마침 전두환 대통령이 시찰을 오셨기에 그 말씀을 드렸더니 그 자리에서 문교부장관에게 전화를 해서 검토를 지시하셨어요. 그렇게 시작해서 종합대로 승격이 됐습니다. 그 당시 청주대보다 시설이나 여타 조건이 더 나은 서울시내의 5개 대학이 청주대 덕분에 덩달아 종합대로 승격이 됐습니다. 충북대 의과대학 역시 제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개설되었구요.

Q 예나 지금이나 인재를 키우는 일은 절대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 지역의 학생들이 좋은 교육을 받고 중앙에 진출했을 때 선배들이 이들을 잘 이끌어 주어야 할 텐데요. 다행히 장관님 같은 분이 계셔서 든든합니다. 더 듣고 싶은 이야기도 많고 해 주실 이야기도 많은 줄은 알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고 지금 막 꿈을 키우고 있는 고향의 후배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시지요.
A 저는 어렵게 공부를 했습니다. 서울대에 다닐 때에도 입주가정교사를 했습니다. 점심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던 시절입니다. 물론 그 시절과는 상황이 많이 다르겠지만 그래도 제 경험을 살려 보건대 지금 고학하는 모든 젊은이들, 그리고 청소년들에게 반드시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것은 '성실하라, 인내하라, 그러면 대접 받게 된다. 만일 대접 받고 있지 못하다면 우선 자신이 성실했나 반성해 보라'는 것입니다.

Q 마지막으로 괴산·증평군민들에게 한 말씀 하신다면?
A 아까도 잠시 말씀 드렸지만 오늘의 저를 만들어 주신 건 고향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힘이 다할 때 까지 우리 괴산·증평군이, 중부4군이, 나아가 충청북도가 잘 사는 지역이 될 수 있도록 미력이나마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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