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범구 국회의원(증평·진천·괴산·음성)
정범구 국회의원(증평·진천·괴산·음성)
  • 이상훈 대표
  • 승인 2012.02.03 14: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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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대표기자의 취중토크!

요즘 정범구 국회의원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 국회와 중부4군을 넘나들다 보니 들리는 말로는 지난 1년간 차량 주행거리가 6만㎞를 훌쩍 넘어섰단다. 며칠 전 신문에 '베스트 국감의원'으로 정 의원이 선정됐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났다. 지난 1년 동안 우리 괴산 증평을 위해 열심히 뛰었으리라 짐작됐다. 그러면서 그 짧은 기간에 남들이 인정해 줄 만한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비결이 궁금해졌다. 워낙 바쁜 일정을 소화해 내는 그인지라 참으로 어렵사리 자리에 초대했다.

Q 초선은 아니지만 국회의원에 당선되신 지 만 1년이 지났는데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며칠 전 신문을 보니 베스트 국감의원으로 선정되셨던데 굉장히 바쁘셨겠습니다.
A 예. 1년 동안 제 차의 주행거리를 체크해 보니 6만㎞를 훌쩍 넘었더군요. 정치인에게는 중앙정치도 중요하지만 지역구를 챙기는 일도 중요하거든요. 우리 지역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야 대책을 세울 것 아닙니까? 지역구 행사나 간담회를 통해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지난달에는 음성읍, 진천, 청주, 괴산, 감곡, 증평, 다시 음성까지 지역행사와 간담회에 참석하느라 하루에 총 260㎞에 달하는 거리를 강행군하기도 했습니다.

Q 사실 이 지역에서 정치하시는 분들이 중부4군이 힘든 지역이라고 종종 이야기합니다. 지역 특성상 소재지들이 지나치게 분산되어 있고 거리가 멀어 지역구 한 바퀴 돌려면 큰맘 먹어야 한다고들 하던데요.
A 그렇죠.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행사 일정이 겹치면 정말 난감합니다. 거리라도 가까워야 가서 인사라도 드릴 텐데 난처한 경우가 많습니다.

Q 지난 보선 때 정 의원님의 중부4군 출마는 의외였는데요.
A 지난 선거에 출마했을 때 사실 '무늬만 고향이지 무슨 고향이냐?'라는 비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고 싶어서 떠나는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유세 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짧은 기간에 산업화를 겪으며 고향을 떠나게 된 세대입니다. 저 뿐만이 아닌 많은 분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고향을 등져야만 했던 때지요. 아버님이 일찍 고향을 떠나 서울로 만주로 다니시다가 결국 일본에서 자리를 잡으셨답니다. 일본에선 그래도 생활에 여유가 있으셨는지 조부모님을 모셔다 함께 사시다가 해방을 맞으셨다는군요. 그러자 할아버님께서 '해방이 되었는데 무엇 하러 남의 나라에 있느냐?'며 귀국을 고집하셔서 조부모님만 모셔다 드리고 다시 일본으로 들어갈 요량으로 대문만 걸어 잠그고 귀국하셨답니다. 헌데 막상 귀국을 하고 보니 일본으로 돌아갈 뱃길은 막히고 고향에는 생활기반도 없던 터라 어렵게 일자리를 구하신 곳이 미군부대였답니다. 처음에는 어머님만 아버님을 따라가시고 저는 고향에서 조부모님과 함께 생활하다가 평택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어차피 내 태가 묻힌 곳이고 고향이라는 것이 국적처럼 바뀔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충북이 고향이라고는 하지만 저 역시 제가 중부4군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습니다. 가끔 제 머리로 해석이 되지 않을 때는 '하느님의 뜻인가 보다' 하고 생각하곤 합니다.

Q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말이 있듯 사람은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 편입니다. 어릴 때의 환경 탓인가요? 사회문제에 일찍 눈을 뜨셨다는 이야기를 많이 접했는데요.
A 물론 주변에서 어렵게 사는 이들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어릴 때 어머니께서 “남의 염병(장티푸스)이 내 고뿔만 못하다”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지금이야 장티푸스가 병원에 가서 치료만 받으면 금세 낫는 병이지만 예전에는 목숨이 오락가락 하는 큰 병이었지요. 그런데 그렇게 큰 병보다도 내가 걸린 가벼운 감기가 더 중한 병인 법이거든요. 어머니는 늘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라는 당부를 하곤 하셨는데 그런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입장이 어릴 때 사회의식을 키우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Q 어린 시절에는 어떤 꿈을 꾸셨나요?
A 모든 사람들이 다 명확한 꿈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 뭔가가 되고 싶다고 처음 생각한 건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는데 버스 운전기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앞자리에 앉아 포장된 도로를 멋지게 달리는 버스의 기사가 핸들을 돌리는 모습을 보면 그게 예술이더라 이겁니다. 그게 아마 처음 가져봤던 꿈인 것 같습니다.

Q 의원님 말씀대로 어렸을 때부터 구체적인 꿈이나 확신을 갖고 출발하는 사람은 드물지요. 그럼 학창시절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인물로는 어떤 분이 계실까요?
A 고등학교 때부터는 독서가 가장 많은 영향을 줬구요, 중학교 2학년 때 우연히 접한 백범일지를 보며 '아, 우리나라가 이렇게 어설프게 외세에 먹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김구 선생은 사심 없는 순수한 분이셨습니다.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종교를 수차례 바꿀 만큼 자신을 온전히 다 바치는 분이셨지요. 그런 모습이 어린 마음에 각인되었던 것 같습니다.

Q 학창 시절에도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으셨지만 청년 정범구 이야기를 좀 해 주시지요.
A 아버님이 크게 사회의식이 있는 분도 아니셨고 집안에 공부를 많이 한 분이 계신 것도 아닌데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신문을 많이 읽었어요. 대학에 막 입학하고 나서는 유신조치가 내려지고 사회가 숨 막히는 분위기였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저 뿐만이 아니라 시대적 상황이 젊은이들을 그렇게 만들었지요.

Q 대학 졸업 직후 YMCA에서 일을 시작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A 76년에 YMCA에 간사로 들어가게 됩니다. 종교를 갖게 되면서 하느님의 역사, 정의, 뜻을 받아들이게 되었지요.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데 내가 도구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79년 마부르크(Philipps-Universitat Marburg)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지요. 그리고 나서 곧바로 10·26과 5·18 광주민주화 항쟁 등을 뉴스로 접하게 됐습니다. 한국에서야 오히려 국내 사정에 어두웠지만 독일에서는 실시간으로 한국의 상황이 TV로 방영됐기 때문에 그 충격이 더 컸습니다. 그 때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가를 진중히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Q 구체적으로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유학을 떠나신 거죠?
A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부터 독일은 시민사회운동이 상당히 발달한 나라입니다. 처음 독일 유학을 결심했을 때는 독일의 사회운동을 배우러 나갔다고 봐야지요.

Q 독일 유학 시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A 처음 나갈 때는 독일 개신교 장학금을 받았었습니다. 독일은 법으로 정해진 국교는 없지만 개신교와 천주교 신자가 주를 이루고 교회는 국가에서 재정적 지원을 받습니다. 결국 국가에서 주는 장학금이나 다름없지요. 독일에서 만 11년을 공부하면서 7년간은 이런저런 장학혜택을 받았습니다만 이후 4년간은 안 해본 일이 없습니다. 호텔 벨보이 부터 화장실 청소, 용접공, 주물공장에서는 섭씨 900도에서 막 나오는 주물을 처리하는 일도 했습니다. 한국에서라면 그렇게 다양한 경험은 해 보지 못했을 겁니다.

Q 그 시기의 경험이 의원님께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A 아시겠지만 독일은 선진국이고 우리나라보다 국민소득도 몇 배나 많은 나라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잘 사는 나라일지라도 노동자들의 삶은 팍팍하더군요. 귀국해서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독일에서 고생했던 경험이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Q 결혼은 언제 하신 겁니까?
A 집사람은 YMCA에 근무할 때 만났습니다. 결혼을 하고 함께 독일로 갔지요. 당시만 해도 일반인이 해외에 나간다는 것 자체가 힘든 시절이어서 한 번 나가면 공부가 끝나기 전 까지는 감히 들어올 생각을 못하던 시절이었거든요.

Q 그럼 가족과 함께 귀국하신 건가요?
A 아닙니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갈 나이가 되어 아내와 아이들만 먼저 귀국했습니다. 아이들 교육만큼은 한국에서 시켜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가족들이 귀국하고 저는 저대로 독일에서 집사람은 집사람대로 한국에서 고생했지요.

Q 11년을 독일에서 보냈다고 하셨는데 귀국하신 직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A 79년 10월 3일에 한국을 떠나 90년 10월 4일에 귀국했으니 만 11년을 독일에서 생활한 거죠. 귀국해서는 시간 강사를 했는데 처가가 대전이어서 충남대와 한남대, 그리고 제 모교인 경희대에서 2년 동안 강의를 했습니다. 보따리강사인 셈이죠. 그러다가 92년도에 현대그룹에서 운영하는 연구소에 정치팀장으로 근무하면서 점차 안정이 되고 이후 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을 시작으로 KBS '정범구의 세상읽기', 그리고 97년 대선토론회 사회까지 맡게 되었습니다.

Q 의원님의 정치행적을 보면 2000년 16대 총선에서 고양시 일산구 갑에서 새천년민주당 공천으로 당선, 2002년에는 민주당 대변인을 맡으셨고, 2003년에는 총선 불출마 선언, 2007년 문국현 창조한국당 후보를 지지하면서 정계에 복귀해 창조한국당 선거대책본부장으로 활동하셨고, 2008년 통합민주당에 복당해 18대 총선에서 우리나라 정치 1번지라 할 수 있는 중구에서 출마 2위로 낙선, 2009년 중부4군 보선에서 민주당의 공천으로 재선에 성공하는 결코 순탄한 길은 아니었던 듯 싶은데요.
A 저는 정치인으로서는 팔자가 기구하다고 생각합니다. 총선을 3번 치르면서 3번 모두 다른 지역구에서 출마를 했거든요. 지난 선거에서 28일을 남겨두고 공천을 받았다고 하지만 18대 때는 불과 15일을 남겨두고 공천을 받았거든요. 그 중 이틀은 선거사무실 구하러 다녔고 나머지 13일이 선거운동을 한 기간이었습니다. 비록 내 문제지만 정치인으로서는 참 기구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더군요.

Q 그만큼 당에서 정 의원님의 역량과 인지도를 인정하고 나름대로 준비된 인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A 당이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당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당이 어려울 때 계속 고사하는 것도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Q 그럼 지난해 출마한 것 역시 의원님의 의지 보다는 당의 의지였다는 말씀이시네요.
A 세상에 아무 이유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고향에 와서 봉사하라는 뜻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충북 출신이기는 하나 줄곧 수도권에서 성장하다 보니 사고 자체도 수도권 중심으로 굳어져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막상 고향에 내려와 보니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차이가 엄청나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수도권에서만 정치를 했다면 알 수 없었을 겁니다. 국토의 균형발전이 정치의 본질이라는 생각을 비로소 하게 되었고 그것이 저에게 주어진 사명이라 생각합니다.

Q 지난 선거 기간 중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A 지난 선거는 김종률 전 의원에 대한 대법원 형이 확정되면서 불과 한 달 사이에 치러지게 됐지만 당이 나를 필요로 하고 김 의원의 간곡한 부탁도 있던 터라 준비가 전혀 안 된 상태에서 20여 일 만에 부랴부랴 선거전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다른 후보들로부터 '철새'라는 공격도 많이 받았습니다만 무엇보다 제가 태어난 지역에서 같은 집안인 타 당의 후보가 공격을 많이 하더군요. 그런 공격을 받을 때마다 마음에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현실적으로 고향을 오래 떠나 있었으니 그런 정서를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가슴이 많이 아팠던 것이 사실입니다. 또 하나는 '당신이 우리지역 출신도 아닌데 신경 쓰겠냐?'는 식의 소지역주의였습니다. 이 조그만 땅에서 분열의 정치를 해야겠습니까? 쪼개기 시작하면 자기 식구밖에 남지 않지요. 국회의원은 지역 군민들이 뽑기는 하지만 국가의 이익을 우선으로 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일정 지역이 아닌 중부4군 공통의 이익를 우선하는 것이지요. 의정활동을 하면서도 늘 그 꼬리표가 따라다닙니다. 4개 군 중 경쟁하는 사업의 경우 다 되면 좋지만 어느 한 쪽에 가게 되면 불만이 많지요. 군민들이 폭넓게 생각하고 극복해야 할 과제입니다. 애향심은 있어야 하지만 배타적이어서는 안됩니다.

Q 선거 기간 중 '아, 내가 이기겠구나' 하는 감을 잡은 시기는 언제인가요?
A 아시겠지만 의외로 증평에서 가장 많이 나왔습니다. 정확히 감을 잡은 때는 증평시장을 방문했을 때인데 그곳 상인들이 정말 인간 대 인간으로 반갑게 맞아 주시는 게 느껴지더군요. 그 때 '이 선거는 내가 지면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여론조사 결과에는 경 후보와 박빙의 대결로 나오니 마지막까지 긴장은 하고 있었지요.

Q 시사프로그램을 진행해 보신 경험이 있어선지 언론플레이를 잘 하십니다. 지역 현안사업을 많이 챙기시던데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의원생활 하시면서 느끼는 보람이라면 어떤 것일까요?
A 선거 때 어느 토론회에서 여당 후보가 자신은 여당이니 잘 할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국가적인 쟁점도 아니고 지역문제에 있어 여·야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한 적이 있습니다. 국회의 예산 시스템은 정부가 예산안을 짜서 국회로 보내면 상임위에서 심사를 하게 됩니다. 여기서 지역 사업들을 최대한 끼워 넣어야 하는데 내 상임위에 해당하는 사업만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해당 상임위원들을 찾아다니며 부탁을 하는데 일단은 같은 당이 편하니 먼저 찾게 되고 여의치 않으면 다른 당 의원에게라도 부탁을 합니다. 지역 현안을 위해서는 무조건 해봐야죠.

Q 짧은 시간 안에 지역 예산 확보에 많은 기여를 하신 것으로 압니다. 현재 여성가족위원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농림수산식품위원회 의원으로 활동중이신데 제가 궁금한 건 왜 농림위를 선택했나입니다. 경험도 있으신 문방위가 더 익숙하실테고 문방위 하면 상당히 인기 있는 상임위 아니겠습니까?
A 저에게 중요한 것은 선거 때 군민들에게 한 여러 가지 약속들입니다. 문방위가 의원 개인으로서는 화려하고 폼 나지만 막상 지역에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또 하나, 우리 지역은 농업군인데 역대 충북도 민주당 의원 6명 중에 농림위원이 한 명도 없더라 이겁니다. 처음 당에서도 문방위 권유가 있었지만 저로서는 농림위가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Q 마지막으로 군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 있으시다면.

A 그동안 국정활동에 만전을 기할 수 있도록 성원해 주신 지역주민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지역 유권자와 끊임없이 교감하면서 국민들의 구체적인 삶의 실체를 들여다보면서 정책을 만들어 가겠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얼굴의 정범구 국회의원은 잘 생긴 외모만큼이나 샤프한 달변가로도 유명하다. 준비된 공식석상이 아닌 사석에서도 그렇게 완벽한 모습일 수 있을지 궁금했었는데 허물없는 취중토크에서 만난 정 의원의 인상은 한 마디로 '클래식' 하다는 느낌이었다. 길지 않은 시간, 같은 남자로서 약간의 질투가 날만큼 흠잡을 데 없는 언변과 사려 깊은 매너, 사회를 꿰뚫어 보는 예리한 통찰력,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정 의원 특유의 따뜻함까지,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잘 다듬어진 일찍부터 준비된 정치인의 면모를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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